고래 꼬리 / 유봉희
그때 고래가 나타났다
수평으로 활짝 펴지는 꼬리
천천히 물속으로 떨어지는 꼬리지느러미
조각조각으로 흐르는 빙하 속을 꼬리로 물레방아를 돌리며
고래 한 마리가 침실 발코니 앞으로 오고 있다
여행객들이 스텐드바나 다이닝 툼에서
저녁을 기우리고 있을 때
멀리서 올린 꼬리가 안테나였는지
모자도 없이 바람에 날리는 한 사람을 읽었나보다
아득한 시간 넘어 바다로 들어간 그가
그의 꼬리로 가장 크고 오래된 책장을 넘긴다.
이 두근거림을 그냥 침묵이라고 말 해 버릴 수는 없겠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왜 자꾸 바다로만 가고 싶었던지
나에게 낯 선 바다란 없었다.
이제 어두워 가는 빙하 위에서
몇 천 만년만의 해후를
안타까운 10초의 꼬리로 만났다.
그래, 세상 밖에서도 내가 진정으로 만나는 것들은
머리가 아닌 꼬리였었지
내일 아침 이 배는 항구에 닿고
바다를 떠난 오랜 후에도
고래는 바다를 넘듯 시간을 넘어 나에게 올 것이다
그리움 또한 꼬리여서.
- [문학과 창작 . 2011 ,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