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신화의 혀 안 돌아가는
남녀 신의 이름을
죽죽 따로 외는 이들이
백결(百結)선생이나 수로부인,
서산대사나 사임당을 모르듯이
클레오파트라, 로미오와 줄리엣,
마릴린 몬로, BB의 사랑이나
브로드웨이, 할리우드의 치정(痴情)엔
횡한 아가씨들이
저의 집 식모살이
고달픈 사정도 모르듯이
튤립, 칸나, 글라디올러스,
시크라멘, 히아신스는
낯색을 고쳐 반기면서
우리는 넘보아도
삼생(三生)에 무관한 듯
이름마저도 모른다.
그 왜, 시골 그대들의 어버이들이
전해가지고 붙여오던
바우, 돌쇠, 똘만이,
개똥이, 쇠똥이, 억쇠,
칠성이, 곰, 만수,
이쁜이, 곱단이, 떡발이,
삐뚤이, 순이, 달,
서분이, 꽃분이,
이런 정답고 구수한 이름들 함께
우리 이름도 한번 들어보겠는가.
민들레, 냉이, 달래, 비듬,
떡쑥, 토끼풀, 할미꽃,
범부채, 초롱꽃, 쐐기풀,
이런 것이야 누구나 알지만
홀아비꽃대, 염주괴불주머니, 광대수염,
개부랄풀, 벼룩이자리, 개구리밥,
도깨비쇠고삐, 퉁퉁마디, 무아재비,
며느리배꼽, 개미탑, 큰달맞이꽃,
처녀이끼, 도둑놈갈구리, 도깨비바늘,
거지덩풀, 애기똥풀, 미치광이,
이렇듯 재미있고 천연(天然)스런
이름들을 들어보기나 했는가?
땅속 줄기에다
홀아비 사추리의 무성한 것 같은
꽃수술을 달았으니
홀아비꽃대요,
퉁겨운 줄기에
꽃주머니가 양쪽으로 달렸으니
염주괴불주머니요,
홍자색(紅紫色) 입술 꽃부리로
아래턱이 세 갈라진 데다
두 장의 수염 같은 수술꽃이 달렸기에
광대수염이요,
온몸에 짧은 털이 나고
잎은 뭉툭한 톱니를 가진데다
불그레한 두 장의 꽃이
마치 덜렁덜렁 달린 무엇 같기에
개불알이요,
잎은 둥근알 꼴
온몸엔 가는 털이 끼어서
벼룩이가 붙은 꽃 같기에
벼룩이자리요,
겨울 연못에도
눈을 맞으며 떠 있기에
개구리밥이요,
덩이줄기에다
길이 1미터나 되는 큰 잎이
광택을 내고 있어 `그로테스크´하기에
도깨비쇠고삐요,
바닷가에
큰 마디가 줄기마다 달린
퉁퉁마디,
역시 바닷가에 살지만
굵은 무 같은데
거기다 수염이 달려
무아재비,
고운 여인 알몸의
꽃 속이 피어서
며느리배꼽,
이삭꽃이
불개미떼가 붙은 것같이
황갈색으로 피기 때문에
개미탑,
큰달맞이꽃은
온몸에 부드러운 융털이 있고
여름밤에 노랑꽃이
크게 피어 어울리며
처녀이끼는
제주도 나무와 바위에
실꼴[絲形]로 흐느적거리고
잎과 홀씨주머니가 알을 품은 것 같다.
이름마저 흉측한 도둑놈갈구리는
부스스한 열매가 한번 옷에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고
도깨비바늘도 역시
바늘 같은 열매가 달라붙으며
거지덩굴은
더러운 손자국, 발자국처럼 지저분하고
애기똥풀은
노란 진물이 나오고
미치광이는
흙탕 같은 온몸에 잎과 꽃이
어둡고 어지럽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며느리미씨개, 참소리쟁이,
갓버섯, 벌레잡기, 오랑캐, 끈끈이주걱,
팔손이나무 등
우리 친구들 이름과 그들의 특징을
주워 섬기자면 한이 없다.
옛부터 일러오기를
하늘이 녹(祿)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싹트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길섶이나 밭두렁이나 산비탈에
어느 누구의 신세도 안 빌고
자연으로 싹터서 자연의 구실을 하다
자연히 스러지는 우리들의 본명(本命)!
그대 시인(詩人)이란 것들마저
함부로 잡초(雜草)라 부르고
소외(疎外)하는가!
(구상·시인, 1919-2004)
'손님 문학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의 기도 / 임영준 (0) | 2024.08.07 |
---|---|
나무의 경지 / 정병근 (0) | 2024.08.01 |
7월 / 목필균 (0) | 2024.07.07 |
6월 / 박건호 (0) | 2024.06.27 |
민들레 / 이윤학 (0) | 202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