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품(鰒) / 유봉희 바닷가 횟집에서 유품 한 점 얻었다 일생 동안 그린 그림 한 폭 등 뒤에 숨겼다가 생이 끝나는 날, 활짝 열어 보여주는 전복(鰒)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들며 누구의 화풍도 닮지 않은 작품 밤낮으로 쏟아지는 파도의 채찍 속에서 가장 멀리, 보이지 않는 별빛까지도 바람에 실어 날랐네 천 갈래의 파도 소리 속에서 화음을 골라 달빛을 입혔네 누구라도 한 생 한 곳에 마지막 끈으로 매어 달리면 절로 은은한 광채 나는 작품이 되는가 미주 문학방 2024.10.19
머무는 강(江) / 손종렬 다 굽이치기만 하랴 강물이라고 모두 흘러가기만 하랴 세상에는 머무는 강도 있어 자꾸 흘러가라고만 하지 말라 흐르지 못해도 강이다 때로 눈물 흘리며 못다 부른 노래 부르느라 멈춰 선 채로 우는 강 다 울고 나서야 비로소 흘러 우는 소리가 없는 강 강이 울지 않고 흐른다고 모르지 말라 강 (江) 도 저 흘러가고 싶은 데가 있어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 만나야 할 그대 거기 있음에 .. 미주 문학방 2024.08.28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 / 손종렬 3.1 탑골 공원에 비둘기가 없다 서울 시청 옥상, 광주, 서대전 공원에도 비둘기가 보이지 않는다 다 어디로 갔니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자고 이제야 외치지만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한번 날아간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울지 말라 제 태어난 곳 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날아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그동안 어디서 잘 살고 있었으며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우리는 한 번이라도 눈과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미주 문학방 2024.02.20
말굽처럼 굽은 공간을 타고 / 최희준 절대온도 2.7 K* 암흑의 공간 창조의 비밀 속에 만들어진 인연의 끈으로 나와 당신을 묶는 순간 나의 눈빛은 우주 바다에 떠밀려 말굽처럼 굽은 공간을 타고 은하수를 돌아온다 세상 길을 다 거쳐온 이 불꽃이 당신 눈동자에 또렷하게 나의 영상을 새긴다 그 영상이 아침마다 우주의 지평선을 오르며 따뜻한 빛 속으로 나와 당신을 안고 간다 우리 몸의 원자들이 세상을 하직하고 쌍을 이루어 암흑 공간을 가는 날에는 또 다른 인연을 계획하고 있을 게다. *우주공간의 온도는 2.7 K (영하271.3도)이다 2.29.2008 미주 문학방 2024.01.12
금문교 1 / 장금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다리 황금빛 번쩍이는 천국인 줄 알았네 붉은색 주탑은 교각도 없이 227.5m 하늘 향해 뻗쳐있고 주탑과 주탑 사이 1,280m 중앙부 해면에서 70m 높이 수심 깊어 대형선박도 통과시키고 해면과 다리의 사이가 넓어 비행기도 통과 시킨다니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의 경지 넘어 신이 만든 작품이라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신의 작품 위해 죽어갔네 봉덕사의 에밀레종처럼 피와 살 섞어 아름다움 만들었네. 금문교 사진 . 권의진 (7.4.2009) 미주 문학방 2023.11.21
무반주 발라드 중에서.소설/ 신예선(SF 한국문학인 명예회장) 누구를 만날때는 기쁨으로 시작되어야한다. 나는 기쁨으로 만나고 기쁨으로 관계를 시작하고싶다. 슬픔은 남에게 의존하고, 기쁨은 혼자 가지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인간은 의외로 타인의 슬픔에 너그러워 보였다. 아마도, 타인의 슬픔을 보면서 자신이 위안을 받고 있는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타인의 기쁨에는 놀랍게도, 자신이 누리지못하는 묘한 부러움 때문인지 진실로 나누기를 거부하는것을 보았다. 진정으로 기쁨을 나눌수있는 관계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나는 믿는다. 슬픔은 TV의 뉴스시간에 나오는 비운의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함께 할수있었으니까.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의 비운 앞에서도 가슴이 아프고 때로는 눈물까지 흘릴수 있기도 하니까. 7.20.2009 미주 문학방 2023.07.12
독자시. 민족의 여명 / 문장선 (시카고) 1) 먹구름이 삼천리에 뻗쳤다 천둥 울고 날 벼락 치고 어둠이 겨레를 삼킨다 빛 잃은 36년 아가는 철벽 속에서 울어만 대는데 왜 밤은 이다지도 길었나? 서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긴 일식은 걷히고 햇살이 구름을 헤쳤다 한 피 받은 겨레 태양빛 한결같은데 좁은 땅덩이에 생각은 각가지 자웅의 줄 다리기에 허리가 잘렸다 2)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두 마리 용이 겨루고 할퀸 자리엔 붉은 피가 솟고 또 쏟아지네 폐허의 잿더미 위에 어미 잃은 아이들 히죽 웃고 빛으로 기어간다 4.19, 5.16 총칼이 번득이고 탱크소리 뭉치소리 태양의 그림자를 뒤 물릴 때 소나기 퍼부어 한을 멍들게 했다 하늘 저편에서 훈풍이 불어오고 그리도 질기게 기다린 자유의 잎새 선열의 피 머금고 피어나네 3) 오랜 세월 속 반만년을 이어온 민.. 미주 문학방 2023.03.21
나를 눌러 주는 힘 / 강학희 하늘과 땅 사이 지금 막 떠오르는 풍선과 내려앉는 풍선 풍선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조여 오는 바깥세상의 압박 때문이다 꿈이 부풀수록 더욱더 거세게 누르는 힘 팽팽히 맞서는 풍선 밖에서 미는 힘과 안에서 버텨내는 힘, 나를 과시하려는 힘과 나를 누르려는 힘으로 서있다 우주 속 하늘과 땅 사이 멀리서 가까이서 흔들리고 있는 너와 나 우리의 부유浮遊를 보라 가라앉기도 뜨기도 하는 신묘한 존재 기쁨과 슬픔의 화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오늘도 나를 눌러주는 어떤 힘으로 나는 알맞게 떠 있는 것이다. 미주 문학방 2023.02.03
글을 사랑하는 가슴에게 / 김종회 내 북창(北窓)에 깃든 동도(同道)의 벗 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홍자성의 [채근담] 은 내게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이 그다지 무게감 없는 처세 철학서에 경도되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바로 잡지 말고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 어린 마음에 참 그렇다 싶었다. 그런데 또 다음 구절을 보고는 이 책이 무슨 삶의 계시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인데, 내 부족하고 깊이가 덜한 글쓰기의 행적은 그것이 시발이었다. 보라! 천지는 조용한 기운에 차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해와 달은 주야로 바뀌면서 그 빛은 천년만년 변함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적막이 있다. 이것이 우주.. 미주 문학방 2023.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