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북창(北窓)에 깃든 동도(同道)의 벗
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홍자성의 [채근담] 은 내게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이 그다지 무게감 없는 처세 철학서에 경도되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바로 잡지 말고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
어린 마음에 참 그렇다 싶었다. 그런데 또 다음 구절을 보고는 이 책이
무슨 삶의 계시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인데, 내 부족하고 깊이가
덜한 글쓰기의 행적은 그것이 시발이었다.
보라!
천지는 조용한 기운에 차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해와 달은 주야로 바뀌면서 그 빛은 천년만년 변함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적막이 있다. 이것이
우주의 모습이다. 사람도 한가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며
한가한 때일수록 장차 급한 일에 대한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아무리 분주한 때일지라도 여유 있는 일면을 지니고
있을 것이 필요하다.
기실 삶의 완급을 조정하는 지혜를 가르친, 저 중국 명나라 말엽의
이 대중 교화론은, 경학(經學)에 명운을 건 유학의 정명주의자
(正名主義者)들에게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되, 당시의
필자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거기서부터 문장을
외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우기로 하면 외워야 할 시와 산문들이
즐비했고, 또 그렇게 외운 문장의 구절들은 글을 쓰는 펜 끝에서
여러 모양으로 되살아나 허약한 내 글을 부축해 주었다.
비단 글뿐이겠는가. 글은 곧 말이니,
말속에도 암기된 문장의 조력이 마른나무뿌리를 적시는 지하의
수맥처럼 혼연 했다. 그 무렵 그렇게 외운 시와 문장이 300편을
넘었던 것 같다. 내 외우기의 발걸음이 한 동안 머물렀던 곳은,
이백과 두보의 종횡무진한 시편의 집산지 당시(唐詩)의 세계였다.
이백의 다음 기 [산중문답(山中問答)] 가운데 '답산중인(答山中人)'은
나로서는 끝까지 실현 불가능할 세속으로부터의 초절(超絶)이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했다.
問余何意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누가 내게 묻기를 왜 푸른 산에 사느냐길래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니 그 마음 절로 한가롭구나
복사꽃 흐르는 물에 아득히 멀어져 가는데
별천지에 있으니 인간세계가 아니로구나
한 때 고전 문학을 공부하고 중국 한시를 공부해볼까 고민을
했을 만큼, 이 시는 그 고운 무늬결과 웅숭깊은 존재감으로
내게 육박해 왔다. 그와 같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옛 글에도 그에 필적할 재능과 표현이 잠복해 있음을
발견하고서였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언덕 위에 풀빛 푸른데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언젠가 이 시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이 시는 고려시대의
천재시인 정지상이 지은 [님을 보내며(送人)]라는 절창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이 얼마나 많이 대동강에 보태어지는지
그 강물이 결코 마를 리 없다는, 함축적 표현의 묘를 얻었다"
라고 적었다. 이렇게 외웠던 글 들은, 아직도 내 마음속
보고(寶庫)를 채우고 있는 재산 목록들이다. 선비의 글방을
북창(北窓)이라 하거니와, 이들은 거기 글 쓰는 동도(同道)에
참예한 귀한 손님들이다. 나는 나의 남아있는 날들을 도리 없이
그리고 기꺼이 이들과 어깨를 걸고 살 것이다. 고단한 인생길
나그네의 길벗으로서, 이들보다 더 신실한 동역자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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