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송(雜草頌) / 구상 희랍신화의 혀 안 돌아가는 남녀 신의 이름을 죽죽 따로 외는 이들이 백결(百結)선생이나 수로부인, 서산대사나 사임당을 모르듯이 클레오파트라, 로미오와 줄리엣, 마릴린 몬로, BB의 사랑이나 브로드웨이, 할리우드의 치정(痴情)엔 횡한 아가씨들이 저의 집 식모살이 고달픈 사정도 모르듯이 튤립, 칸나, 글라디올러스, 시크라멘, 히아신스는 낯색을 고쳐 반기면서 우리는 넘보아도 삼생(三生)에 무관한 듯 이름마저도 모른다. 그 왜, 시골 그대들의.. 손님 문학방 2024.07.22
7월 / 목필균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선 반환점에 무리 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손님 문학방 2024.07.07
6월 / 박건호 이 세상 슬픈 것들은 모두 6월의 산하에 갖다 놓아라 여름으로 접어드는 길목 신록은 우리의 아픈 곳을 덮어주리라 하늘과 바다와 땅이 온통 하나의 색깔로 노래하는 계절 가난하고 약한 자의 설움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이나 가슴 터질 것 같은 그리움도 풀잎 끝에서 부는 바람이나 되어라 이 세상 슬픈 것들은 모두 6월의 산하에 갖다 놓아라 저 마약과 같은 폭염 속을 걸어가기 위해 일단 여기쯤에서 통곡할 자는 통곡하고 노래할 자는 노래하자 손님 문학방 2024.06.27
민들레 / 이윤학 민들레꽃 진 자리 환한 행성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가벼운 홀씨들이 햇빛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 머물러 있는 행성 하나 마음의 끝에는 돌아오지 않을 행성 하나 있어 뿔뿔이 흩어질 홀씨들의 여려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는 높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손님 문학방 2024.06.22
적중的中- 사진 전시장에서 / 손남주 비상하는 날개를 향해방아쇠를 당기듯고독한 눈이 셔터를 누른다 순간의 포착이영원을 낳는, 빛을 주물러 혼을 빚을 때,날렵한 그 손길은 삶을 꿰뚫는 오랜 발자국이 되리 어둠이거나 밝음이거나사각死角 뒤의 진수眞髓를 노리며 어제도오늘도흩어진 세상, 초점焦點을 모아번쩍,가슴에 새긴다 손님 문학방 2024.06.02
잠시 눕는 풀 / 장석주 풀은 조용하다.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뿌리의 정적 쪽으로 마음을 눕히고 풀은 조용하다. 바람은 흐린 하늘을 쓴 소주처럼 휘저으며 벌판을 들끓는 아픔으로 흔들며 온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과 흔들며 지나가는 것 사이의 긴장은 고조된다. 시간은 어디론가 숨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바람은 오고 잠시 풀은 눕고,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풀은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눕히지만 끝내 바람은 흙 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 종.. 손님 문학방 2024.05.18
어머니 / 김종상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 듯 책을 읽으면 싱싱한 보리숲 글줄 사이로 땀 젖은 흙냄새, 엄마 목소리 손님 문학방 2024.05.10
엄마와 할머니와 마누라와 딸은 / 이민호 세상의 티끌 속에 이슬 맺혀 있다네 이슬 속에 갇힌 사람 있다네 거기 살다 늙고 늙어지면 또르르 굴러 떨어져 이 세상 아무 파문(波紋)도 없을 티끌 속에 이슬 속에 만다라 손님 문학방 2024.04.30
별을 보며 /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 제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손님 문학방 2024.04.20
역모 / 전병석 내일이면 엄마는 퇴원한다 형제들이 모였다 엄마를 누가 모실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큰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양원에 모시자 밀랍처럼 마음들이 녹는다 그렇게 모의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던 작은 형수 전화가 숨 넘어간다 어머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며...... 퇴원 후를 걱정하던 바로 그 밤 자식들의 역모를 눈치챘을까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셨다 손님 문학방 2024.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