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 손광세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국경을 넘는다. 이탈리아를 지나면 스위스가 나타나고 프랑스가 나타난다. 그래, 그렇지. 이승의 국경을 넘으면 거기에도 나라는 있겠지. 호반이 있고 새들 지저귀는 숲이 있고 마을이 있겠지. 사진 . 권의진 손님 문학방 2024.03.21
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의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손님 문학방 2024.03.16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손님 문학방 2024.03.01
공원 벤치에서·9 / 최재형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면 문득 함께 살던 식구들 생각이 난다 지금은 내 곁을 다 떠나가고 없는 그 식구들이 아내는 산에 갖다 묻고 자식 놈은 분가해서 나가 살고 딸년들은 모두 제 짝을 만나 남의 식구가 돼 가고 나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어쩌다 한 자리에 모일 때가 있으면 이미 그들은 이전의 내 가족이 아니다 인제는 다들 내 마음 밖에서 살고 있다 이제 내게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세월이 마지막으로 내놓는 절박한 문제가 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노인들은 서로 말하지 않는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다 나도 지금 그들과 마주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다 손님 문학방 2024.02.25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손님 문학방 2024.01.22
눈 내리는 날 / 이해인 눈 내리는 겨울 아침 가슴에도 희게 피는 설레임의 눈꽃 오래 머물지 못해도 아름다운 눈처럼 오늘을 살고 싶네 차갑게 부드럽게 스러지는 아픔 또한 노래하려네 이제껏 내가 받은 은총의 분량만큼 소리없이 소리없이 쏟아지는 눈 눈처럼 사랑하려네 신(神)의 눈부신 설원에서 나는 하얀 기쁨 뒤집어쓴 하얀 눈사람이네 손님 문학방 2024.01.17
흐르는 내 눈물은 / 하이네 흐르는 내 눈물은 꽃이 되어 피어나고 내가 쉬는 한숨은 노래되어 울린다. 그대 나를 사랑하면 온갖 꽃들을 보내 드리리 그대의 집 창가에서 노래하게 하리라. 손님 문학방 2024.01.07
여행에의 초대 / 김승희 모르는 곳으로가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모르는 도시에 가서 모르는 강 앞에서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모르는 오리와 더불어 일광욕을 하는 것이 좋다 모르는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기가 허드슨 강이지요 아는 언어를 앚어버리고 언어도 생각도 단순해지는 것이 좋다 모르는 광장 옆의 모르는 작은 가게들이 좋고 모르는 거리 모퉁이에서 모르는 파란 음료를 마시고 모르는 책방에 들어가 모르는 책 구경을 하고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모르는 주소를 향하는 각기 피부색이 다른 모르는사람들과 서서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너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도 너를 모르는 자유가 좋고 그 자유가 너무 좋고 좋은 것은 네가 허드슨 강을 흐르는 한포기 모르는 구름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것.. 손님 문학방 2023.12.08
12월의 기도 / 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 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 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 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손님 문학방 2023.12.03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손님 문학방 202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