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문학방 36

그리움은 게 한 마리의 걸음마처럼 / 유 하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를 걷습니다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문득 손톱만 한 게 한 마리 획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쩐지 그 게 한 마리의 걸음마가 바닷물을 기다리는 갯벌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그 마음 그토록 허허롭고 고요하기에 푸른 물살, 온통 그 품에 억장 무너지듯 안기고 마는 걸까요 아아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당신이여 난 게 한 마리 지날 수 없는 꽉 찬 그리움으로 그대를 담으려 했습니다 그대 밀물로 밀려올 줄 알았습니다 텅텅 빈 갯벌 위, 난 지금 한 마리 작은 게처럼 고요히 걸어갑니다 이것이, 내 그리움의 첫걸음마입니다

손님 문학방 2023.09.16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

손님 문학방 2023.08.31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8.14.2017

손님 문학방 2023.07.26

젊음 / 사무엘 울만(미국 시인)

젊음이란 인생의 한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력,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젊음이란 생명의 깊은 샘물에서 솟구치는 신선함을 말한다, 젊음이란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일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이십 대의 청년보다 육십 대의 사람이 더 젊음이 흔히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하여 누구나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영혼은 주름지게 못한다. 고뇌, 공포, 자신결핍은 기력을 쇠잔케 하고, 정신을 시들어 버리게 한다. 육십 세이든 십육 세이든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마음속에 경이로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

손님 문학방 2023.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