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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손님 문학방 2023.11.01

편린 / 권의진

어느 체험 학습시간에서 둥그런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든 아무거나 마음대로 그려 보라는 자유 시간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대로 따라서 그리고 난 후 제목은 연륜으로 정했다 어쩌면 사는 만큼의 조각들이 아픔, 상처, 어둠, 불안, 슬픔, 분노, 고통 등의 색들로 겹겹이 가슴에 수없이 나이테를 그리어 때론, 튕겨 나가고 싶어도 그것은 여러 색으로 다져진 가슴 한가운데의 작은 불씨하나로 따스히 스스로를 지키려 꺼지지 않고 있었고 살면서 참느라 가슴에 묻혔던 것 들, 참고 인내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겼던 세대에서 과연 참는 자의 멍울은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마저 맴돌았다 마음 안에 있는 그대로의 표출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함은 인내의 푸른색, 그것으로 겉 테를 푸르게 마무리 짓고 있었다 내..

호박이 되는 날 / 김미희(아동문학가)

발표하러 나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다리가 후들후들 그까짓 발표 호박들밖에 없는 걸 뭐가 걱정이야? 호박 한 덩이 호박 두 덩이 잘생긴 호박 못생긴 호박 삐죽이 호박 슬며시 나오려는 웃음 간신히 참으며 씩씩하게 발표했다 그것 봐, 하나도 안 떨리지? 환한 엄마의 목소리 그럼 친구가 발표할 때 나도 호박이 되는 거야? 1.5.2012

동시 모음방 2023.10.17

죽어라 현장을 파고드는 사람 / 고도원의 아침편지

죽어라 현장을 파고드는 사람 어떻게 보면 제가 살아온 길이 참 단순합니다. 남들 다 꺼리는 현장만 죽어라 판 거니까. 그래서 그전부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제가 아직도 어느 공장 사장인줄 알아요. 공장 사장 맞습니다. 공장 사장하다가 공장이 여러 개로 늘면서 사장들한테 자리 내주고 회장이 된 거니까. - 박도봉, 김종록의《CEO박도봉의 현장 인문학》중에서 - *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신문 방송기자도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특종을 낚아올릴 수 있습니다. 현장을 지키고 현장을 죽어라 파고들어야 길이 보입니다. 직접 경험의 세계가 깊어지고 성공의 문도 열립니다.

그리움은 게 한 마리의 걸음마처럼 / 유 하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를 걷습니다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문득 손톱만 한 게 한 마리 획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쩐지 그 게 한 마리의 걸음마가 바닷물을 기다리는 갯벌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그 마음 그토록 허허롭고 고요하기에 푸른 물살, 온통 그 품에 억장 무너지듯 안기고 마는 걸까요 아아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당신이여 난 게 한 마리 지날 수 없는 꽉 찬 그리움으로 그대를 담으려 했습니다 그대 밀물로 밀려올 줄 알았습니다 텅텅 빈 갯벌 위, 난 지금 한 마리 작은 게처럼 고요히 걸어갑니다 이것이, 내 그리움의 첫걸음마입니다

손님 문학방 2023.09.16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

손님 문학방 2023.08.31